saiba 流 불모산 만추를 즐기다 (20211113) - with 죄와벌

2021. 11. 16. 17:00saiba 2019-2024 산행기

 






▶ 이번 주말은 원래 지리산 박산행 가는 날이다.


어쩌다가... 마음이 편하지 않는 사소한 일이 발생하여 그냥 꼬릴 내렸다.

saiba 산님이 산에 간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마음의 평안함을 얻기 위함이다.
어쩜 궁극적으로 자신의 마음의 자유로움을 만끽하기 위함일지도 모르겠다.

그 대상산이 지리산속이면 더더욱 좋겠지만... 어디까지나 산은 산일뿐 동네산속에서도
나름대로 충분히 즐길 수 있는 방법을 잘 알고 있기에 대안으로 가벼운 마음으로
동네산으로 자신을 발걸음하게 한다.  

 

 

 



 

 

 






▼ 들머리에 펼쳐지는 풍광

 

 

 

 






▼ 만추 햇살이 곱다

 

 

 






▼ 가을의 끝자락을 붙잡고 있는 듯한 푸르름

 

 

 






▼ 저~ 멀리 보이는 불모산 정상 아래에 위치한 박지로 향하여 Let's Go~~!!!

 

 

 






▼ 가을빛이 느므느므 곱게 느껴진다

 

 

 






▼ 성주골

 

 

 






▼ 만추 가을 하늘 풍광

 

 

 






▼ 노오~란 가을빛 향연

 

 

 






▼ 불타는 듯한 단풍

 

 

 







 

 

 






▼ 그냥 그냥 아름답다

 

 

 







 

 

 







 

 

 






▼ 황홀경을 느끼게 하는 노오~란 가을빛 향연 분위기

 

 

 







 

 

 







 

 

 







 

 

 







 

 

 






▼ 최절정의 가을빛 단풍향연을 연출하고 있다~!!! 

 

 

 






▼ No Words~~!!!

 

 

 







 

 

 







 

 

 






▼ 예술적 차원의 단풍향연을 연출하고 있는 듯 하고... (^^)

 

 

 







 

 

 







 

 

 







 

 

 






▼ So~~ Good~~!!!

 

 

 






▼ 성주지골 만만추 분위기

 

 

 






▼ 하룻밤 묵을 보금자리를 마련하다

 

 

 






▼ 나름대로 밥짓는 Gear 도 가능한 UL (Ultra Light) 개념으로 개선하고 있는 중 ㅎㅎㅎ

 

 

 







 

 

 







 

 

 







 

 

 






▼ 낙엽 양탄자를 즈려밟고 하산하는 중

 

 

 






▼ 숲속나들이길 (1)

 

 

 






▼ 외계인 투구바위

 

 

 






숲속나들이길 (2)

 

 

 






숲속나들이길 (3)

 

 

 







 

 

 






▼ 아름다운 노오~란 가을빛 향연

 

 

 






▼ 황홀경 분위기

 

 

 






▼ 생강나무 단풍향연

 

 

 






▼ 대암산 자락의 고당봉

 

 

 







 

 

 






▶ saiba 산님은 만추 시즌에 가을빛 향연을 연출하는 수종(種)중에 생강나무의
노오란 단풍향연을 좋아한다. 고도를 낮추면서 무거운 발걸음으로 산자락 방면으로
하산하는 saiba 산님의 눈을 쉼없이 즐겁게 해주는 묘~한 마법을 느끼게 한다. 

 

 




 일본 에도시대 하이쿠(俳句) 시인으로 요사부손(与謝蕪村)이라는 분이 있다.
그분의 유명한 하이쿠중에 saiba 산님이 제일 좋아하는 다음과 같은 시구가 있다.


菜の花や  (유채꽃이여)
月は東に  (달은 동쪽에)
日は西に  (해는 서쪽에)



일본의 하이쿠(俳句)는 대개 5·7·5음절로 이루어져 있다. 매우 짧은 시구(詩句) 속에
자연의 미(美)를 담은 시들이 많다. 짧은 시구처럼 찰나의 아름다움을 주로 표현한다.
상기 하이쿠는 봄철 해질녁에 노오란 유채꽃이 만발한 들판에서 펼쳐지는 찰나의
황홀경 자연풍광을 표현한 것이다.


saiba 산님은 매년 봄철 유채꽃이 만발할 즈음엔 나름대로 상기의 하이쿠를 읊으면서
행복해 하는 자신을 발견 한다. 이번 하산중에 산자락에 연출되고 있는 생강나무의
노오란 단풍을 목격하고선 자신도 모르게 상기의 하이쿠가 연상되었다. 마침 그때
연출되고 있는 자연 풍광을 발견하고는 다음과 같이 찰칵사진으로 표현해 보았다.

 

 

 

 

 






▼ 생강나무 단풍이여

 

 

 






▼ 달은 동쪽에

 

 

 






▼ 해는 서쪽에

 

 

 












▼ 양지바른 곳에서 끈질기게 자신의 자태를 뽐내고 있는 개망초

 

 

 






▼ 귀가 버스를 기다리다

 

 

 






▼ 아파트 주변의 만만추 분위기

 

 

 







 

 

 







 

 

 






▼ 이번 박산행중엔 지난주부터 접하고 있는 아래의 도스토예프스키의
장편소설(950p) <죄 와 벌>을 JPN AudioBook 으로 완청(完聽) 하였다. 

 

 







 

 

 

P.S (1) :

<죄와벌>에서 독자들이 좀 지리하게 느껴질 수 있는 부분이 어쩜 예비판사 포르피리와
라스콜리니코프와 대화일지도 모르겠다. 라스콜리니코프의 살인범죄 혐의를 확실하게 
갖고 있는 예심판사 포르피리가 심리취조 수단을 사용하여 표면적으로 너무나도 부드럽게 
서서히 몰아 붙히면서 스스로 자백을 하도록 유도하는 너무나도 긴~긴~ 대화분위기가
펼쳐진다. 현시대에 살고 있고 있는 본인도 이해하기에 힘들 정도이랄까?

이런 접근법은 포르피리의 말에 의하면, 100마리의 토끼를 모아도 한마리의 말이 될 수가
없다는 비유를 들면서... 너무나도 찐~한 <혐의>가 있지만 빽박의 <증거>가 없는 상태로 
구속해서 재판을 할 경우엔 자신이 불리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런 설명은 현시대의 사법
체계에서는 당연시 되지만, 러시아 제정시대하에서도 과연 그렇다고 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생긴다. 그 시절엔 공권력의 횡포를 사용하여 조금이라도 <혐의>가 있으면, 
바로 잡아넣고 무자비한 취조 고문을 해서 자백을 받아내는 방식이 횡행되지는 않았을까?

<죄와벌(1866)>의 소설이 발표된 것은 <차르>가 통치하는 러시아제정 시대이다. 이런
세계적인 명작이 언제쯤 한글로 번역되어 한반도에 사는 독자들에게 읽히게 되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갑자기 생긴다. 그런 궁금증을 간접적으로나마 이해하기 위해서 나름대로
다음과 같은 내용들을 인터넷으로 구글링해 보았다.

일본에서 이 소설이 처음으로 번역되어 일본내에 소개된 것은 1892(明治25)경이라고 하며, 
영어번역본을 입수하여, 전반부만 일본어로 번역되었다고 한다. 그 이후에 러시아어에서
일본어로 최초로 번역된 것은 1924(大正11)이며, 그 이후에도 1935(昭和10)~平成 에 걸쳐
꾸준히 여러 번역가에 의해 다양한 번역본이 발간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런 사실을 감안해서 합리적인 유추를 해볼때... 한반도인이 처음으로 <죄와벌> 작품을 
접했을 시기는 일제강점기(1910~1945)라는 암흑기를 고려해 보면, 아마도 처음엔 거의가 
일본어 번역본을 통해서 접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리라. 그 시대에 주로 고등 일본어을 
습득한 한반도 인테리들이 <죄와벌>속에 나오는 포르피리의 심리취조에 대해 어떤 느낌을 
받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 시절 완장찬 <순사>나리들께서는 <인권>이란건... 똥개에게나 준 상태에서 공권력을 
무자비하게 휘둘렀던 시절이었음을 감안할 때, 포르피리의 취조 방법에 대해, 좀 쌩뚱스럽게 
느껴지는 한편, 그 당시 그들이 실제로 피부로 느끼고 있었던 일제사법 제도 보다도 알게 
모르게 <러시아>의 사법제도에 대해 좋은 이미지를 갖게 되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는데... (^^)







 P.S (2) :

<죄와벌>의 여러 등장인물중에 세월의 흐름에 따라 오십중반의 <스비드리가일로프>에 대한 
인상이 조금씩 다르게 느껴진다. 소설속에 전해지는 이미지는 방탕하고 호색가이며 때론 살인
까지 일삼는 무서운 캐릭터로... 그런데, 소설 후반부에서 <스비드리가일로프>가 실제로 행한
여러 선행(?)들은 독자들에게 어떻게 느껴질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 선행들이란... 첫째,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의 장례를 무사히 치뤄지게 지원한 것. 둘째, 남겨진 3명의 자녀를 거금을
지원해서 고아원에서 살 수 있도록 한 것. 셋째, 라스콜니코프가 시베리아 수용소에 생활할 
것을 예상하고는 소냐에게 3천루불을 지원해서 뒷바라지를 할 수 있겠금 한 것등.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해서 그런식으로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돈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현실 
세계에서는 거의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누구에게나 늘 <선>과<악>의 양면을 갖고 있으며,
어떤 상황하에 쳐해 있는가에 따라 밖으로 표출되는 이미지가 다를뿐이리라. 이 소설이 제대로 
바람직하게 마무리짓게 가능하게 만든 것은 현실적으로 스비드리가일로프의 <선행>을 빼
놓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이리라. 만약 소냐가 갑자기 고아가 된 3명의 이복동생들을 어쩔
수 없이 돌봐야 할 처지였다면, 과연 착한 소냐가 동생들을 내몰라라 하고는 라스콜니코프의 
뒷바라지를 위해 시베리아로 따라갈 수 있었을까?

<죄와벌>... 이 소설의 진면목을 제대로 감상하기란 쉽지가 않은 듯 하다. 10대땐 그냥 범죄
탐정소설 정도로 감상한 것 같다. 20대땐 주인공의 <정의> <사상> <종교>등을 제대로 
이해하기가 어려움을 느꼈던 것 같다. 세월 흘러... 요즘들어 자신을 힘들게 하는 것은 서구
세계의 유일신 종교관에 대한 근원적인 이해부족인 것 같다. 이 소설속엔 본인이 느끼기엔
좀 쌩뚱맞게 라스콜리코프가 소냐에게 <라자로의 부활>을 읽어 달라는 대목이 나온다.
이 부분의 클라이막스는... "나는 진리요 길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자는 죽어도 살아날 
것이고 살아서 믿는이는 영원히 죽지 않으리라 너는 이것을 아느냐?"... 인 것 같다. 이런
복음서가 소설 배경에 면면히 흐르고 있는 듯 하다. 

우째꺼나... 이 소설은 앞으로도 그 진면목의 심하이해를 위해서라도 또 다시 읽어 볼 가치가
충분히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 바이다.  (특히, 제4편 제4장 - 살인자 라스콜니코프가 갑자기
매춘부 소냐의 방에 찾아가서 나누는 대화내용는 서로가 전혀 이해하지 못한채 이어져가고
우연히 옆방에서 스비드리가일로프가 엿듣고 있는데, 그 부분은 본 소설의 핵심적인 내용을
함의하고 있다고 본다. 앞으로 그 부분을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